새해 계획을 세우지 않기로 한 첫 번째 이유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계획과 현실 사이의 간격이 조금씩 벌어졌다.
예상보다 느리게 가는 날들이 쌓이고, 계획표에 체크하지 못한 칸들이 늘어났다.
그때부터 계획은 나를 돕는 도구가 아니라,
지키지 못한 나를 증명하는 기준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번 새해에는 그 반복을 멈추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계획을 세우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계획을 세우는 순간보다 무너지는 순간이 더 선명하게 남았다
돌이켜보면, 내가 기억하는 건 계획을 세우던 순간의 의욕보다 그 계획이 무너졌을 때의 감정이었다. 처음에는 일정이 조금 밀렸을 뿐인데, 그 밀림이 곧 ‘실패’처럼 느껴졌다. 하루 이틀 어긋난 일정은 금세 죄책감으로 바뀌었고, 그 죄책감은 다시 나를 재촉했다. 결국 계획을 따라잡기 위해 무리하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지쳐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특히 퇴사 이후에는 이 패턴이 더 선명해졌다. 회사라는 구조 안에서는 계획이 조금 흔들려도 그 틀 안에서 다시 정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혼자가 된 이후에는 계획의 흔들림이 곧 나 자신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다. ‘내가 방향을 잘못 잡은 건 아닐까’ ‘아무 준비도 없이 나온 건 아닐까’ 계획이 무너질 때마다 이런 생각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점점 계획을 세우는 행위 자체가 부담스러워졌다.
계획이 나를 움직이게 하기보다, 나를 평가하게 만들었다
계획의 가장 큰 문제는 결과보다 과정에 있었다. 계획을 세운 이후의 나는 늘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었다. 오늘은 계획 대비 몇 퍼센트를 했는지, 이번 주 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는지, 예상보다 뒤처진 건 아닌지 끊임없이 점검했다. 그 점검은 어느 순간부터 나를 응원하기보다 나를 몰아붙이는 목소리로 바뀌었다.
계획을 지킨 날에는 잠시 안도했고, 지키지 못한 날에는 이유를 찾기보다 나를 탓했다. 그렇게 쌓인 감정은 결국 “나는 계획도 제대로 못 지키는 사람”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계획이 아니라 방식이었지만, 그 당시의 나는 그걸 구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새해에는, 더 이상 나를 평가하는 도구로 계획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계획을 내려놓자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들
계획을 세우지 않겠다고 마음먹자 처음에는 불안이 먼저 찾아왔다. 아무 기준도 없이 한 해를 시작하는 게 마치 방향 없이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조용히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의외로 또렷해지는 것들이 있었다.
무엇을 꼭 해야 하는지는 사라졌지만, 무엇을 계속하고 싶은지는 더 분명해졌다. 글을 쓰는 일, 기록을 남기는 일, 나의 속도를 지키며 하루를 살아가는 일. 이것들은 계획표에 적히지 않아도 이미 내 일상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계획이 없어도 삶은 이미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고, 나는 그 흐름을 억지로 통제하려고 애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계획 대신 ‘패턴’을 선택한 이유
그래서 나는 계획 대신 패턴을 선택했다. 패턴은 계획보다 훨씬 조용하다. 완성해야 할 날짜도 없고, 실패라는 단어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 하루를 건너뛰어도 다시 돌아오면 되고, 속도가 느려져도 방향만 유지하면 된다.
이틀에 한 번 글을 쓰고,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가능한 범위 안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 이 단순한 반복이 오히려 나를 안정시켜 주었다. 패턴을 지키는 날이 늘어날수록 나는 다시 나를 신뢰하게 되었다. 누가 보지 않아도, 결과가 바로 나오지 않아도 나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감각을 되찾았다.
새해를 새 출발이 아닌 ‘연결의 지점’으로 바라보다
이번 새해는 나에게 새 출발이라기보다 지금까지의 시간을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지점에 가깝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도, 완전히 새로운 목표를 세우겠다는 선언도 없다. 대신 지금의 나를 조금 더 이해한 상태로 다음 날을 맞이하려고 한다.
계획을 세우지 않기로 하자 새해에 대한 부담도 함께 줄어들었다. 무언가를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 대신 그냥 계속 살아가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단순한 생각이 오히려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번 새해에 내가 지키고 싶은 단 하나
이번 새해에 나는 목표를 적지 않는다. 대신 한 가지 태도를 지키기로 했다. 나를 몰아붙이지 않는 태도, 비교하지 않는 태도, 지금의 속도를 존중하는 태도. 계획을 세우지 않기로 한 첫 번째 이유는 게을러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오래 가고 싶어서였다.
이번에는 더 나은 내가 되기보다, 무너지지 않는 내가 되고 싶다. 그 선택이 지금의 나에게는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솔직한 새해 준비다. 계획을 세우지 않기로 한 이 결정이 나를 더 자유롭게 만들고, 조금 더 오래 나 자신으로 살아가게 해주기를 나는 조용히 기대하고 있다.
이 글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